실로암안과병원 원장이신 김선태 목사(1940~)를 흔히 한국의 헬렌켈러(Helen Keller)라 부릅니다. 영국에는 밀톤이, 미국에는 헬렌 켈러가, 일본에는 이와하시다께오가 있어 실명자들에게 희망과 꿈을 주었듯이 한국에는 김선태 목사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가 10살 되던 해 625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어느 날 친구들과 놀다가 집으로 달려와 보니 폭격으로 집이 몽땅 없어졌습니다. “엄마! 아빠!”를 목이 메도록 부르면서 온 동네를 헤매었지만 부모님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삽시간에 고아가 된 것입니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구걸하며 하루하루 보내던 8월 어느 날,그는 다른 어린 친구들과 뚝섬 쪽 과일 밭에서 참외, 수박 서리로 과일들을 따먹고 있을 때 한 친구가 주운 수류탄을 만지작거리다 ‘펑’ 하는 굉음과 함께 터진 수류탄으로 그는 양쪽 눈을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그는 땅을 기어 다니며 논두렁에 고인 물을 마셔 갈증을 면해야 했고, 어떤 때는 풀잎을 뜯어먹으며 이곳저곳을 헤매었습니다. 죽을 고비를 맞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는 주일이면 교회를 찾아 예배드렸고 구걸하여 얻은 돈 중에서 새 돈을 골라 헌금했습니다. 그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다는 굳센 결의로 8개월간 서울맹학교에서 점자를 배운 후에 숭실중·고에 진학하였고 졸업 후 숭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목사가 되기 위해 장신대 신대원으로 진학하였습니다.
그는 땀과 눈물을 바쳐서 자신의 생명과 맞바꿀 각오로 공부했습니다. 학교 다니는 동안 그는 제대로 잠을 자지 못 했고 너무 가난하여 겨울에도 여름옷을 입어야 했으며 이불 없이 추운 겨울을 텅 빈 기숙사에서 홀로 지내야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에게 미국으로 유학할 길이 열렸고 드디어는 매코믹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가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봉사활동에 매진했습니다. 1970년 그는 최초로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교회를 설립하여 점자성경과 점자찬송을 보급하였습니다. 1986년에는 故한경직 목사 등 각계의 도움을 받아 서울 등촌동에 실로암안과병원을 설립하여 지금까지 2만7천여 명에 이르는 시각장애인들의 개안(開眼)을 도왔고 무려 35만 명에게 무료 안과진료를 하면서 실명 예방에 힘써 왔습니다. 그는 중국 연변과 필리핀, 방글라데시와 케냐 등에서도 무료 안과진료와 개안수술 활동을 해 왔으며, 북한에 ‘움직이는 실로암안과병원’이라는 진료버스를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공로로 그는 막사이사이상 공공봉사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선정위원회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김 목사가 펼쳐 온 사회봉사활동 공로를 인정해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며 “이 상은 제 개인의 것이 아니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실명 예방과 개안수술을 위해 도와주신 교회들에게 주신 상”이라고 수상 소감을 밝혔습니다. 김 목사는 수상금 5만 달러를 현재 계획 중인 실로암아이(eye)센터 건축기금으로 내 놓았고 귀하게 쓰였습니다. 아시아지역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실로암아이센터는 지상 9층, 지하 3층에 연건평 2천4백 평 규모입니다.
김선태 목사가 이룩한 공헌은 모두 그의 실명인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그의 실명은 자신에게 처절한 슬픔과 좌절을 강요하는 불행의 씨앗이 아니라 수많은 실명자들을 눈 뜨게 하는 소망의 씨앗이 되었다 할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자졌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뜻을 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요 9:7]